PHOTOMAN  사진강좌 - 사진의 역사 사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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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하우스 ( Bauhaus, 1919 1933 )
20세기에 들어서 인류는 역사상 참혹했던 전쟁이 발발하였고,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이전의 어느시대 보다 더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극단적인 시기를 살아오는 동안 예술가들의 감수성 역시 과거와는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성과는 바로 추상미술의 등장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20세기 전반기에 현대 추상미술을 발화시킨 작가들을 논함에 있어 바우하우스는 하나의 시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각의 다양화와 함께 실험적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부류가 등장하였는데 이에 바우하우스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3월 20일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에 의해 독일의 바이마르시(Waimar)에 국립종합조형학교(Das Staatiches Bauhaus)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Bau'는 독일어로 건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시사하듯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분야의 총제적 조화를 꿈꾸었던 조형예술가들의 실험장이자 교육기관으로서의 조형예술학교였다. 이처럼 바우하우스는 조합적 조형학교로서 단지 하나의 전문인을 양성하는 곳은 아니었다. 공예, 디자인, 건축, 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통합한 교육기관으로서 여기에 사진도 한 분야로서 자리잡게 되면서 형식주의와 만드는 사진의 근원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로피우스가 기초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의 선언과 강령을 볼 것 같으면  첫째로 예술과 생활을 융합하기 위해 건축을 중축으로 하는 제예술의 통합이념. 둘째 조형활동에 있어서 수공작을 중시이며 여기에 1923년 세번째 목표인 실용성을 기초로 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통합이 부가되었다. 수공작을 중요시한 초기의 바우하우스에서는 기계기술과의 대결을 회피했으나, 전후 산업계의 눈부신 발전과 부흥은 바우하우스로 하여금 기계 기술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크게 변혁시켜 놓았다. 이러한 과제의 새로운 해결에 대해서 기하학적인 추상미술의 합법칙성은 잘 어울렸다. 그 뿐만 아니라 추상미술은 이제 더 이상 장식이나 개성적 표현에서 해방되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전형미를 가능하게 했다.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시에서 시작하여 뎃사우, 베를린으로 이사하며 결국 1933년 7월까지 14년에 걸쳐 운영되다가 독일의 Nazi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되기 전까지 약 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내었다. 폐교가 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는 우선 대부분의 교수가 유태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라는 것으로 반 독일적으로 생각하였고, 또 실험적 모더니즘의 사고는 공산주의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우하우스가 폐교되자 이곳에 모여있었던 많은 미술가들은 프랑스, 미국, 스위스 등지로 저마다 뿔뿔히 흩어졌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남긴 발자취는 후대의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오늘날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선구적인 커다란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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