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MAN |
전쟁사진
(War Photography) |
전쟁사진 (War Photography) |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단지 귀향하는 군인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거나 시나 문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간접적
경험에는 사진도 포함이 되는데 사진은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장면을 가장 생생히 느낄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인 선명함과 디테일한
세부묘사를 통하여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전쟁
상황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가장 처음 전쟁을 기록한 것은 1855년
크리미아 전쟁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후 1861년 미국의 남북전쟁, 1936년의
스페인 내란과 중일전쟁, 이어서 제2차세계대전, 1950년대의
한국전쟁, 1965년 베트남전쟁 등이 일어날 때마다 사진은
이용되어왔다. 초기에는 전쟁을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낭만적인
장면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인간이 벌여놓은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장면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각종
포토 저널리즘들이 생겨나면서 세계 각국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전쟁 상황을 어떤한 설명이나 글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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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미아
전쟁에서의 로저 펜튼(Roger Fenton) |
로저 펜튼은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크리미아 전쟁에 파견되어 전쟁을 제일 먼저 광범위하게 사진으로
보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법률에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진가로 전업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그가
사진가로 명성을 얻고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받아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초기에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할 당시 기본 바탕은 콜로디온 습판법을 고안했던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의 방법을 지켰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수정을 가하여
감광처리 함으로써 유명해져 대영 박물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면서 부터이다. 펜튼이 대영 박물관 사진가로 제직시 그의
탁월한 사진 솜씨가 인정받아 1855년에 발발한 크리미아 전쟁의 현장
사진을 제작하는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영국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전쟁터에 가족이나 친지들을
내보내고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 국민들을
안심시키고자 함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펜튼 사진에는 흔히
전쟁사진에서 보아왔던 참혹한 시체들이나 공포스런 공격장면
보다는 광할한 평원과 치료를 받고 있는 병사, 제복입은 사관이나
민간이의 초상사진 등이 대부분이어서 비극적인 전쟁을 표현하기 보다는 대개 낭만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펜튼의 크리미아
전쟁 당시의 사진들은 결코 목숨을 걸고 촬영한 사진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온해 보이는 전쟁터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타임즈지에서도 그를 표현하기를 「현대
군대의 뒤를 추적했던 이 사진가는 전투가 지나간 자리에 널려 있는
정물이나 병사들의 휴식을 담아내는데 만족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광할한 평원에 밋밋하고 매우 단조로워 보였던 그
사진들도 사실은 목숨을 담보로 하고 제작한 사진이었다. 더욱이 펜튼이 사용한 사진법은 콜로디온 습판법이었기 때문에 모든 암실장비와 약품들, 그리고
몇백장에 이르는 유리 감광판들과 카메라를 늘 소지하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마차를 이용하여 암실을 차려놓고 폭탄이 투하되고
있는 전쟁상황 속에서 이동하며 사진을 제작하였다. 암실 마차의
크기가 적의 목표물이 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웬만한 열성이 아니면
사진을 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남북전쟁에서의 매튜 브래디(Mathew B. Bra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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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lain conducting mass
for the 69th New York State Militia encamped at Fort Corcoran, Washington, D.C., (1861)
by Mathew B. Bra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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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전쟁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매튜
브래디이다. 브래디는 당시 유명한 초상 사진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1861년에 발발한 남북전쟁에 순전히 브래디 개인의 투자에
의해서 남북전쟁에 가담하여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심지어
사진사까지 브래디 자신이 고용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알렉산더 가드너(Alexander Gardner), 티모시 오설리반(Timothy
H. O'Sullivan), 조지 바너드(George N. Barhard)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브래디는 자신이 고용한 사진가들을
신임하지도 않고 그들이 직접 찍은 음화조차도 소지하지 못하게
하여 불화가 생겨 가드너와 오설리반은 브래디와 결별하는 등 그의
작업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을 보면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로저
펜튼이 보여주었던 낭만적인
전쟁사진과는 달리 폐허가 된 전쟁터에 나뒹구는 시체들, 상처를
입은 군인들의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 폭탄이 휩쓸고간 자리,
치열한 전투장면들을 위주로 냉혹한
전쟁터를 한껏 표현하였다. 사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초기만 하더라도 사진가나 예술인에게
있어서 전쟁터는 하나의 좋은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는 장소로
생각할 만큼 여유로웠으나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에서는 그럴만한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의 특징이라면 콜로디온 습판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선명도에 있어서 탁월했으며 명확하고 디테일한
세부묘사를 통하여 공포스러운 전쟁터의 분위기를 사진의 간접적인
경험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참혹한
전쟁에서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진을 촬영해 로저
펜튼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브래디 역시 폭탄과
총소리의 괴음이 들리는 전쟁터에서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하였기 때문에 사진장비를 실은 마차로 전쟁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역사적 현장을 목숨걸고 사진으로
제작하였다. |
브래디는
남북전쟁이 끝나자 자신이 제작한 전쟁사진을 판매하려 하였으나
예상밖으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끔찍했던
전쟁을 애써 잊으려 노력하는 상황아래 당시 전쟁 상황을 생생히
재현하고 있는 사진은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브래디 자신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투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진이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한 개인의
의지로 한 시대의 중요한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을 이루는
공로를 세운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