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MAN  사진강좌 - 사진의 역사 사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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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사진 (Portraits)
초상사진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남기고자 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적 욕망으로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다.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려면 초상화가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초상화의 경우 왕실이나 귀족 등 대개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루이 마예, 에르네스트 마예 형제의 경우 채색 초상사진을 전문적으로 제작하여 사진 수정작업에 앞장섰는데 그들은 부유한 귀족이나 부유층 엘리트들 대상으로 적극적 상업전략을 펼쳐 성공을 거둔 사람들로서 후에는 황제의 전속 사진가가 되어 황실의 지원을 받아가며 여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게되었다.
초상사진이 본격화되어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1854년 프랑스의 앙드레 아돌프-으제느 디스데리(Andre Adolphe-Eugene Disderi)에 의해서 특허를 받은 명함판 사진(Carte-de-Vistite)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급성장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자 초상화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다량의 초상화를 그려야했는데 공급이 따라가 주질 못했다.결국 사진을 이용하에 자신의 모습을 최단시간내에 그려냄으로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는데 다수의 부르주아 집단들의 초상사진을 신분 과시용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초기에 등장한 초상사진의 경우 귀족임을 드러내는 소품들 예를들면 금장식이 되어있는 고급 의자, 커텐등이 필수적으로 이용되었다.  평민들 중에서도 재정적으로 부유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신분에서 한단계라도 끌어올리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초상사진의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가르켜 대중이라 지칭하였다. 이와 더불어 당시 유아사망율이 증가하고 전쟁터에 나간 가족, 친지, 친구들과 오랜시간 혜어져 있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상사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명함판 사진의 주요 고객으로 이제 대중들이 되었다. 더이상 지식인, 예술인, 부르주아들의 장식품으로서의 명함판 사진에서 벗어나 대중으로 고객층이 바뀌었다. 따라서 명함판 사진은 여러분야의 사진가들로 하여금 우선적으로 이익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명함판 사진이란 렌즈가 4개 또는 6개 달린 카메라를 이용하여 한장의 음화에 여러개의 포즈를 찍어 인화지를 절단함으로서 여러장의 사진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디스데리의 경우 단기간의 데생수업만으로 사진업계에 뛰어들었지만 자신의 사진관을 파리에 차리고 얼마되지 않아 대형 사진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결국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져버리고 상업적 사진가로 남아 황실에서 부터 하층 부르주아까지도 고객으로 삼아 그들의 요구에 따라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사진을 제작하여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명함판 사진은 말 그대로 보통 명함과 그 크기가 비슷하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크기가 4*2.5인치로 대개 전신상이 제작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명함판 사진은 모방이 간단하여 기술자적 성향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촬영이 가능했다. 사실상 명함판 사진에서는 초상사진으로서의 예술적인 심미적 가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명의 효과와 모델이 되는 사람의 자세나 표정등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노력없이 단지 기록적 목적으로 사용되어졌기 때문이다. 사진 한장 한장에 주의를 기울일 틈없이 단지 찍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함판 사진은 단순한 개인 기록 위주의 사진이었다. 단순한 기록성 초상사진에서 벗어나 예술적, 창조적 초상사진은 대형판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프랑스의 나다르(Nadar)에 의해서 이룩되어졌다. 그의 본명은 가스파르 펠릭스 뚜르나숑(Gaspard Felix Tournachon)로서 본래 그의 직업은 신문 풍자 만화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때 풍자 만화가 금지되어 사진가로 전업하였다. 풍자 만화가로 활약할 당시 인물의 성격을 직약적으로 들어내는 얼굴의 특징을 포착해야 했기 때문에 풍자 만화가였던 때의 솜씨를 발휘하여 사진을 찍을 때에도 모델이 되는 사람들의 개성을 한껏 살려 창조적인 목적으로 초상사진을 제작하였다. 당시 초상사진은 자신을 과시하려는 생각에 귀족풍의 화려한 장식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고 있었지만 나다르의 사진 스타일은 장식이 없이 모델이 무배경 앞에서서 포즈를 잡아 깨끗하게 처리하엿다. 그리고 보통의 초상사진 처럼 전신상 위주가 아닌 신체의 3/4정도로 카메라에담아 촬영하는 것이 그의 사진의 특징이었다. 다음의 글은 나다르의 사진촬영에 대한 생각이다. 
"사진이론은 단 한시간이면 배울 수 있고 기술적 기술은 단 하루면 익힐 수 있다. 그렇지만 가르쳐서 될 수 없는것은 빛을 읽는 감각이다. 누구도 사진 찍히는 사람의 개성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한 인간의 보다 내면적이고 심오한 차원에서 담은 사진을 제작하려면 즉시 그의 정신세계로 뛰어들어가 그의 기질을 파악해야 한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다르는 감각을 중요시 여기고 이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 하였다. 이처럼 초상사진으로 상업적 사진의 세계보다는 예술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자신의 작품에서도 예술적 심미감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사업상 뒤지지 않고자 많은 양의 초상사진을 제작하면서 사진의 질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당시의 사진관들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예술성을 희생시켜 상업적 사진에 더욱 중점을 두고 육성하였다.
또한 나다르는 실험정신이 매우 강했던 사람으로 초상사진 작업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가지 새로운것을 추구하였다. 그중에서도 초상사진에 인공 광원인 전기조명을 도입하여 촬영한 최초의 사진가들중 하나로 남기도 했으며 또 1858년에는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최초로 공중 촬영을 시도하여 파리를 촬영하여 공중사진의 길을 열어놓은 장본인 이기도 하다. 또한 1861년에는 파리시의 지하묘지인 카타콤(Catacomb)과 하수도 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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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르 부인 The Photographer's Wife" (1853),
by Nadar

초상사진에 있어 또하나의 길을 넓힌 사람은 영국의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이다. 그녀가 카메라를 처음 잡은 시기는 그녀의 나이 48세때 딸과 사위로부터 한대의 카메라를 선물받으면서 부터였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사진기를 잡는 사람들은 대부분 프로들이었는데 카메론의 경우는 아마츄어로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그 열정만큼은 프로들 못지 않았다. 카메론 사진의 특징은 나다르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특징과 성격을 포착하여 사진에 새긴다는 점이고 또한 여성으로서 부드럽고 아름다움보다는 힘과 박력을 중심으로 사진촬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카메론의 초상사진에 모델들의 개성, 특성을 살려 촬영할 수 있는데에는 모델이 되는 인물들이 그녀의 가족이나 주변의 친구, 친지들로 이루어져 가능했던 일이었다. 카메론과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밀접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초상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모델이 되는 인물들의 성격을 평상시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깊은 애정과 이해, 통찰등이 이루어졌으므로 사진속에 그들의 특성이 뭍어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찍은 초상사진을 보면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받을수 있을 것이다. 또한 1867년에 찍은 토마스 카라이(Tomas Carlyle) 초상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역동적인 힘과 박력이 그녀 사진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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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듀크워드 부인 Mrs. Herbert Duckworth" (1867), by Julia Margaret Cameron

그리고 카메론이 추구했던 사진 기법으로는 사진에서 초점을 흐리게하여 주변을 뿌옇게 하여 선명하지 않은것을 도입했었는데 그것은 기술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기대하는 효과를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행해진 방법이다. 이것은 초상사진 뿐만 아니라 활인화라 불렸던 시대극적 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즉 가족이나 친구들이 카메라 앞에서 문학작품에서의 한 장면을 연출해 보이는 것을 통해 회화를 모방한 감상적 사진을 통해서 선명하게 처리하기 보다 마치 하나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카메론이 이러한 사진 기법을 도입하여 회화적 느낌을 부여한 것은 사진의 초점을 흐리게 함으로써 고상함을 불어넣어 예술적 측면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이러한 사진작업으로 카메론의 초상사진은 현존하는 초상사진들 가운데 가장 품위있고 인상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마도 카메론에 대한 이러한 평판들은 그녀가 상업적 사진으로 생계를 유지함으로써의 사진제작이 아니어서 돈의 제약을 떠나 사진촬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펼침으로서 가능했던 것같다. 즉 카메론에게 있어서 사진은 수입원이 아니었고 예술적 표현수단의 하나로 밖에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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